안상호 하영 증조부 | 의사 안상호
- 안상호 하영 증조부


배우 하영이 방송에서 언급한 ‘4대째 의사 집안’의 뿌리가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자격을 취득한 의사 안상호로 알려지면서 그의 생애와 일제강점기 행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안상호가 당시 일본의 동화정책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하면서 친일 행적을 둘러싼 논란도 불거졌다.


안상호는 1872년 태어난 의사로 알려져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등에 따르면 1898년 일본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 입학해 1902년 졸업했으며, 같은 해 의술 개업 시험에 합격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의사자격을 취득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귀국한 뒤에는 당시 조선에 서양의학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1904년 귀국해 지석영이 세운 의학교 등에서 서양의학을 강의했고, 서울 종로 일대에 개인 진료소를 마련해 환자를 진료했다. 의친왕을 보필한 경력도 전해진다.


안상호의 이름이 역사적으로 더욱 유명해진 계기는 고종의 마지막 진료 과정이다. 1919년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뇌출혈로 쓰러졌을 당시 안상호는 일본인 의사와 함께 고종을 진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고종이 사망한 이후 안상호가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 독약을 올렸다는 이른바 ‘고종 독살설’에 연루되기도 했다.


일부 역사 자료와 연구에서는 안상호가 1916년 윤치호 등과 함께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활동한 기록이 거론된다. 대정친목회는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에 순응하도록 계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추구한 단체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기사 역시 논란의 중심에 있다. 1918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에는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일본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인 안상호의 가정이 소개됐다. 기사에는 안상호가 일본식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본인과 다르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내용도 담겼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일본과 조선의 ‘내선일체’ 및 동화정책을 선전하는 매체였다는 점에서 해당 기사가 안상호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자료인지 여부를 놓고 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특정 신문에 실린 발언이나 단체 참여 기록만으로 안상호의 전체적인 행적을 단정하기에는 추가적인 사료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논란은 하영이 최근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면서 시작됐다. 하영은 방송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한양에서 서양의학 전문 의원을 개원했고 고종 황제를 진료했다고 소개했다.



또 증조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까지 이어지는 의료계 가족사를 공개하며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후 온라인에서 하영이 말한 증조부가 안상호라는 추측이 확산됐고, 하영의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 측은 10일 “하영의 증조부가 안상호가 맞다”고 밝혔다. 다만 친일 행적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이번 논란에서 중요한 부분은 안상호 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후손인 하영에 대한 평가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안상호가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자격을 취득하고 귀국 후 서양의학을 전파한 의료인이라는 점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동화정책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는 자료 역시 거론되고 있어 그의 행적에 대한 종합적인 역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고종 독살설처럼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의혹까지 사실인 것처럼 확대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친일 의혹이 제기된 자료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록을 친일 행적으로 단정하는 것 역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하영 본인이 증조부의 구체적인 일제강점기 행적을 알고 있었는지, 또는 이를 옹호하거나 미화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선대의 행적을 후손에게 그대로 책임지우는 연좌제식 비판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