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 별세 신군부 사망
- 정호용 별세


오늘 전해진 소식부터 짚어보겠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유혈 진압에 관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13일 향년 94세로 사망했습니다.
정 전 장관은 최근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빈소는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망 소식이 단순히 한 전직 장관의 별세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5·18 진상 규명과 관련해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마지막 생존자였기 때문입니다.


정호용 전 장관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북고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졸업했고, 1955년 육군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인연이 등장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였습니다.
이후 하나회 인맥을 바탕으로 군내에서 영향력을 키웠고, 전두환·노태우,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전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이른바 신군부 핵심 5인으로 꼽혔습니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12·12 군사반란입니다.
정 전 장관은 이 과정에 가담했고, 반란 다음 날인 12월 13일 육군특전사령관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거세졌고, 계엄군의 강경 진압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 전 장관은 5월 20일부터 27일까지 여러 차례 광주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5월 27일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이 핵심 쟁점이 됐습니다.


이 작전 과정에서 시민들에 대한 무력 진압과 사살이 이뤄졌고, 정 전 장관이 병력을 동원하고 작전을 지휘하는 데 관여했다는 혐의가 제기됐습니다.
조사 과정에서는 광주에 특전사령부 전용 상황실을 운영했고 작전 현안을 보고받았다는 진술도 확보됐습니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정 전 장관은 5·18 진압과 관련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됐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 전 장관은 이후에도 자신이 5·18 당시 공식적인 지휘계통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전사령관으로서 군수와 행정 분야에만 관여했고,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기 때문에 발포와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5·18 관련 의혹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2024년 정 전 장관을 내란목적살인 혐의 등으로 다시 고발했습니다.


광주 재진입작전 당시 병력을 동원하고 지휘한 정황과 작전 과정에서 추가 희생자가 발생한 사실 등이 이유였습니다.
조사위는 정 전 장관이 공수부대 지휘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끝까지 5·18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정호용 전 장관은 이후 육군참모총장과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정치권에도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역시 5·18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신군부 핵심 5인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5·18 당시 정확한 지휘 체계는 어떻게 작동했는지, 발포 명령은 누가 내렸는지,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각 지휘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 데 정 전 장관이 갖고 있던 기억과 증언은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때문에 5·18 유공자들과 관련 단체에서는 정 전 장관의 사망을 두고 책임 규명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94년의 생을 마감한 정호용 전 장관.
그의 사망은 한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 떠났다는 의미와 함께,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5·18 진상 규명의 과제를 다시 한번 우리 사회에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