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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열사 | 김귀정 사망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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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포대믹 2026. 10. 1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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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
김귀정 열사 | 김귀정 사망현장

김귀정 열사 | 김귀정 사망현장

- 김귀정 열

 

김귀정 열사 프로필

  • 이름 : 김귀정
  • 생몰 : 1966년 8월 11일 ~ 1991년 5월 25일 (향년 24세)
  • 고향 : 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출생, 서울 하왕십리에서 성장
  • 학력 : 무학여자고등학교 졸업, 1985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입학 후 중단, 1988년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 입학
  • 소속 : 성균관대 심산연구회 회장, 동아리연합회 총무부장
  • 사인 : 1991년 5월 25일 시위 진압 중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 가족 : 아버지 김복배, 어머니 김종분, 언니 김귀임, 남동생 김종수 / 조카 수영 국가대표 정유인

 

김귀정은 1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로 옮겨 살았다.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들어갔으나 집안 형편으로 학업을 접었고, 뜻을 꺾지 않은 채 1988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경제적 사정으로 휴학을 거쳐 복학한 뒤에는 교내 동아리 심산연구회 회장과 동아리연합회 총무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어머니 김종분은 왕십리역 인근에서 수십 년간 노점을 지키며 삼남매를 키웠고, 딸을 떠나보낸 뒤의 세월은 2021년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김진열 감독)에 담겼다.

 

김귀정 열사가 숨진 1991년 5월 25일 그날

1991년은 '분신 정국'으로 불린 해였다. 그해 4월 26일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노태우 정권 퇴진과 공안통치 종식을 요구하는 항의가 전국으로 번졌다. 뒤이어 여러 청년의 분신과 시위 중 사망이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잇따랐고, 김귀정은 이 흐름 속에서 '열한 번째' 희생자로 기록된다. 거리로 나선 학생과 시민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다.

 

5월 25일, 김귀정은 '고 강경대 열사 살인 만행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 오후 5시경 서울 중구 필동2가 대한극장 맞은편 진양상가 부근에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는 폭 4m 남짓한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목격자들은 경찰이 골목 양쪽에서 최루탄을 쏘며 협공해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뒤엉켰다고 증언했다.

 

최루탄 세례와 추격 속에 좁은 공간으로 몰린 군중의 압박에 김귀정은 쓰러졌다. 인제대학교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숨졌다. 사인은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앞으로 살아갈 날과 이루지 못한 계획을 남긴 채 스물네 살에 세상을 떠났고, 좁은 골목으로 시위 참가자를 몰아붙인 진압 방식이 곧바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사인 공방과 '귀정이를 지켜라'

사인을 둘러싸고 양측 주장이 맞섰다. 경찰과 검찰은 아랫입술의 작은 상처와 무릎의 피멍 외에 뚜렷한 외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압사 또는 쇼크사이며, 밀폐 공간이 아니면 최루가스로 인한 질식사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야와 학생운동 측은 사망 직후 몇 시간 만에 경찰의 과잉 진압과 최루가스에 의한 질식사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검찰은 부검을 위해 시신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왔으나 학생들이 영안실을 둘러싸 저지했고, 검찰은 빗속에서 기다리다 돌아갔다. 5월 26일 새벽에는 경찰이 영안실의 시신을 확보하려 진입을 시도했으나 유족과 성균관대 학생,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관계자들이 막아섰다. 동료 학생과 시민들은 영안실 주변에서 밤을 새우며 시신 곁을 지켰고, 이 상황은 '귀정이를 지켜라'라는 말로 남았다.

 

시신을 지키려 한 이유는 당시의 불신에 있었다. 강경대 사건과 잇단 분신으로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검찰의 강제 부검이 사인을 바꿔 진실을 덮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족과 학생들은 죽음의 경위가 왜곡 없이 밝혀져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의 분위기는 소설가 김소진의 작품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문학화되어 당시를 전하는 기록으로 남았다.

 

백골단이란 무엇인가

백골단(白骨團)은 1980~1990년대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시위 진압과 참가자 검거를 맡은 경찰 사복 체포조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푸른색 재킷과 청바지에 새하얀 헬멧을 쓴 차림이 이름의 유래가 됐다. 방석복을 갖춰 입고 대열을 유지하며 시위대를 밀어붙이던 일반 진압 부대와 달랐다.

 

백골단은 가벼운 복장을 이용해 시위 현장으로 빠르게 돌진했다. 대열을 무너뜨리고 군중 속으로 파고들어 참가자를 끝까지 쫓아가 붙잡는 방식이 특징이었다. 시위 현장에 이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곧 추격과 연행, 물리적 충돌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강경대를 쇠파이프로 숨지게 한 것도, 김귀정을 골목으로 몰아붙인 것도 이 진압 인력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에게 백골단은 국가 권력이 거리의 저항을 어떻게 억누르는지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구사대를 비롯한 강경 진압 조직과 함께 권위주의 통치의 폭력성을 드러낸 존재로, 1991년의 연이은 죽음을 거치며 국가 폭력의 표상으로 기억에 남았다.

 

김귀정 열사의 장례와 국가배상

장례식은 1991년 6월 12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치러졌다. 운구 행렬이 모교를 지나려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이어졌다. 성균관 유림 측이 공자 위패를 지나는 정문 운구를 반대하자,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간청한 끝에 도서관 옆 쪽문으로 행렬이 지나갔다. 유해는 처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안치됐다가, 2016년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묘역으로 이장됐다.

 

죽음은 법정에서도 쟁점이 됐다.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자 1994년 서울민사지방법원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사망에 이른 구체적 경위를 모두 밝혀내지 못하더라도, 경찰이 참가자를 짧은 시간에 검거하려 좁은 골목으로 추격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는 점과 지휘·감독상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도 국가배상 책임을 확정(95다23897)했고, 이 판결은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는 판례로 남았다. 성균관대학교는 매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추모제를 열고, 김귀정 장학금을 마련해 수여한다. 교내에는 김귀정 생활도서관과 김귀정 마당이 조성됐다. 

김귀정사망현장 서울 중구 충무로4가 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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