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원 심문규 이중간첩 꼬꼬무
- 북파공작원 심문규
북파공작원 심문규, 55년 만에 벗겨진 간첩의 누명


심문규는 1925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심문규의 이름은 전쟁 영웅이나 첩보원의 성공담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분단의 비극과 국가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응축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심문규는 북한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다 체포된 뒤 남파되었고, 귀환 직후 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장자수한 이중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961년 사형당했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2012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비로소 억울함을 풀었다.
심문규 프로필


전쟁과 탈출을 반복한 파란만장한 생애


심문규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군 관동군에 복무하던 중 소련군 포로가 됐다. 어렵게 탈출했지만 이번에는 중국 공산군 팔로군에게 붙잡혀 생활해야 했다.


여기서도 탈출에 성공한 심문규는 고향 철원으로 돌아왔다. 당시 철원은 북한 지역이었다. 심문규는 인민보안대원으로 근무했지만 밀주 사건에 연루되며 수감 생활을 경험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철원을 수복하자 심문규는 다시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국군 제6사단 수색대에 입대해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 이후에는 대북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HID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하지만 국가를 위한 임무는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남편이 북파공작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만삭의 아내는 극심한 불안 속에서 낙태를 시도하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심문규는 세 자녀를 남겨둔 채 위험한 임무에 투입됐다.
목숨을 건 북한 침투 작전


1955년 9월 20일 심문규는 북한 침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으로 향했다. 당시 북파공작원들은 신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임무 실패 시 국가로부터 보호받기도 어려웠다.


심문규는 북한 내부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인민군 포로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귀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약속된 철수선이 오지 않았고, 육로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결국 심문규는 귀환 도중 북한군에 체포됐다. 북한은 그를 전형적인 이중간첩 공작 대상으로 삼았다. 북한 여성과 결혼하도록 만들고 대남 공작 임무 수행을 요구했지만 심문규는 오랫동안 이를 거부했다.


그러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일곱 살 아들 심한운이 남한의 첩보부대에서 북파공작원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아들이 산악 훈련과 해상 훈련을 받으며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이야기는 심문규를 크게 흔들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선택한 귀환


결국 심문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남파를 결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에서 새롭게 꾸린 가정과 임신 중인 아내를 뒤로한 채 1957년 남쪽으로 내려왔다. 심문규는 서울에 도착한 직후 처남 집을 찾아 아들을 만났다.


아들이 실제로 첩보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자신이 속했던 첩보부대에 자수했다. 심문규는 남파된 뒤 별도의 공작 활동을 벌이지 않았고, 북한의 지령을 수행할 시간도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모든 사실을 설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563일 불법구금과 사형 선고


자수한 심문규는 곧바로 법적 절차를 밟지 못했다. 육군 첩보부대는 심문규를 무려 563일 동안 불법 구금한 채 북한 정보 수집에 활용했다.
당시 군 내부 문건에는 심문규가 북한에서 체포돼 정보를 제공한 사실은 있지만, 남파 후 임무를 포기하고 자수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사건의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단순히 자수한 공작원이 아니라 "간첩 활동을 위해 위장 자수한 이중간첩"으로 규정된 것이다. 결국 중앙고등군법회의와 육군고등군법회의는 심문규에게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심문규는 1961년 5월 25일 대구교도소에서 형이 집행됐다. 더 비극적인 사실은 가족조차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유족들은 수십 년 동안 심문규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55년 만에 밝혀진 진실


전환점은 아들 심한운 씨가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면서 찾아왔다. 조사 결과 당시 군이 제출한 심문 기록 일부가 조작됐으며, 심문규가 실제로는 남파 직후 자수했음에도 아무런 증거 없이 위장자수자로 몰린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당시 첩보부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북파공작원들이 북한에서 체포됐다가 귀환할 경우 정보를 확보한 뒤 다시 북파하거나 제거하는 관행이 있었다는 내용도 확인됐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재심이 진행됐고, 2012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심문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위장자수했다는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사법부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함과 안타까움을 가진다"고 밝혔다. 이어 "심문규 씨가 떳떳한 대한민국의 일원이었다고 선고함으로써 유족의 명예가 일부라도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판시했다.